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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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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의 마틸다는 1080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3세의 증손녀로 앵글로색슨 왕가의 후손이었다. 1093년 부모의 사망 후 잉글랜드로 건너가 윌리엄 2세의 궁정에서 지내다 1100년 헨리 1세와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섭정으로 활동하며 건축 사업과 자선 활동을 펼쳤고, 신앙심이 깊었으며 1118년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녀는 헨리 1세와의 사이에서 두 자녀를 두었으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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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마틸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3세기 가계도 묘사
칭호잉글랜드 왕비
배우자헨리 1세 (1100년)
자녀마틸다
윌리엄 아델린
가문둔켈드 가문
아버지말콤 3세
어머니마거릿 오브 웨식스
출생명에디트 (Eadgyth)
출생일1080년
출생지던펌린,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일1118년 5월 1일 (37–38세)
사망지웨스트민스터 궁전, 런던, 잉글랜드 왕국
매장지웨스트민스터 사원
통치
즉위1100년 11월 11일
대관식1100년 11월 11일
재위 기간1100년 11월 11일 – 1118년 5월 1일
기타
다른 이름마틸다
관련된 인물
형제자매에젤레드
메리

2. 초기 생애

1093년 마틸다가 13세 때 아버지가 전사하고 스코틀랜드가 내란 상태에 빠지자, 훗날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 에드거, 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 1세 세 형제와 여동생 메리와 함께 어머니 쪽 삼촌 에드거 애설링을 의지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갔다.[8] 왕자들은 윌리엄 2세 (적발왕)의 궁정에 들어갔고, 공주들은 숙모 크리스티나가 원장을 맡고 있는 럼지 수도원에 맡겨졌다.[8]

공주가 수도원에 들어가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윌리엄 2세는 브르타뉴 공작이나 서리 백작과의 혼담을 제시했지만 마틸다는 이를 거절했다. 헨리 1세와 만난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헨리 1세는 형 윌리엄 2세가 죽은 후, 장남 로베르를 제치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위에 오르면 알프레드 대왕의 혈통인 마틸다를 왕비로 삼겠다"고 의회에 확약하여 승인을 얻었다. 마틸다는 모계를 통해 알프레드 대왕의 혈통과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아마도 수도원 시절부터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틸다는 잉글랜드의 왕 스티븐의 왕비 마틸드의 고모이다.

2. 1. 어린 시절

1591년경 세톤 문장집에 묘사된 마틸다의 부모님


1080년 스코틀랜드 던펌린에서 말콤 3세와 웨식스의 마가렛의 딸로 태어났다. 마틸다는 스코틀랜드 왕가와 앵글로색슨 왕가의 후손으로,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증손녀이자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었다.[8] 유아 세례 때 에디스라는 세례명을 받았으며, 로버트 커토즈가 대부,[8] 플랑드르의 마틸다가 대모였다. 어린 에디스가 대모 마틸다의 머리 장식을 잡아당긴 일화는 훗날 여왕이 될 징조로 여겨졌다.

마틸다는 엄격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8] 여섯 살 무렵, 여동생 메리와 함께 잉글랜드 남부 럼지 수도원으로 보내져 교육을 받았다. 이모 크리스티나가 원장으로 있던 럼지 수도원에서 마틸다는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과 성경을 읽었다. 재정 관리와 기하학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13세에 아버지가 전사하고 스코틀랜드에 내란이 일어나자, 마틸다는 형제들과 함께 어머니 쪽 삼촌 에드거 애설링을 의지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갔다.[8]

2. 2. 교육

여섯 살쯤 되었을 때 에디스와 그녀의 여동생 메리는 잉글랜드 남부 럼지 수도원에서 교육받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그녀의 이모 크리스티나가 원장으로 있었다.[8] 이들의 교육은 당시 여성의 일반적인 활동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는데, 어머니가 책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주들은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배우고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과 성경을 읽었다.[8] 에디스는 재정 관리와 기하학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2. 3.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 위기

1093년 마틸다의 아버지 말콤 3세와 오빠 에드워드가 알니크 전투(Battle of Alnwick (1093))에서 사망했다.[8]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웨식스의 마가렛마저 11월 16일에 사망했다. 이후 마틸다의 삼촌 도널드 3세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찬탈하면서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고, 마틸다는 잉글랜드로 피신해야 했다.

살아남은 마틸다의 오빠들인 에드가, 알렉산더, 데이비드는 안전을 위해 잉글랜드 왕 윌리엄 2세의 궁정으로 보내졌으며, 마틸다 역시 이곳에서 형제들과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1097년, 마틸다의 오빠 에드가가 윌리엄 2세의 지원을 받아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3. 결혼과 잉글랜드 왕비

가계도에 묘사된 마틸다 여왕


1100년 11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앤셀름에 의해 헨리 1세와 에디스(결혼 후 '마틸다'로 개명)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마틸다라는 이름은 노르만식 이름이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노르만 신하와 남편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추측된다.[1]

결혼 후, 궁정 사람들은 이들 부부에게 '고드릭과 고다이바'라는 별명을 붙였다.[3] 이는 잉글랜드 노르만 정복 이전의 전형적인 잉글랜드식 이름으로, 윌리엄 2세의 화려함과 비교되는 소박한 스타일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마틸다의 웨스트민스터 궁정은 시인들로 가득했으며, 그녀는 특히 음악 분야의 예술 후원자로 알려졌다.[4]

13세에 아버지가 전사하고 스코틀랜드가 내란에 빠지자, 훗날 스코틀랜드 왕이 되는 세 오빠(에드거, 알렉산더 1세, 데이비드 1세)와 여동생 메리와 함께 외삼촌 에드거 애설링을 의지하여 잉글랜드로 건너갔다.[8] 왕자들은 윌리엄 2세의 궁정에 들어갔고, 공주들은 램지 수도원에 맡겨졌다.[8] 당시 공주가 수녀가 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고, 윌리엄 2세는 브르타뉴 공작이나 서리 백작과의 혼담을 제시했지만 마틸다는 계속 거절했다.

헨리 1세와 마틸다가 만난 경위는 확실하지 않지만, 헨리 1세는 형 윌리엄 2세 사후 왕위를 계승하면서 의회에 "알프레드 대왕의 혈통인 마틸다를 왕비로 삼겠다"라고 확약하여 승인을 얻었다. (마틸다는 모계를 통해 알프레드 대왕의 혈통을 이었다.) 이를 볼 때, 이들은 수도원 시절부터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틸다는 장남 윌리엄과 장녀 마틸다를 낳았다. 잉글랜드 왕 스티븐의 왕비 마틸드는 마틸다의 조카였다.

3. 1. 헨리 1세와의 결혼

1100년 8월 윌리엄 2세가 뉴 포레스트에서 사망한 후, 그의 형제 헨리는 즉시 왕실 재산과 왕관을 차지했다. 그는 교활하고 매우 영리했으며, 엄격하지만 적절한 통치로 알려졌고, 전쟁이나 반란의 경우 가차없는 성격을 드러냈다. 그의 다음 과제는 결혼이었고, 그의 선택은 에디스였는데, 그는 그녀를 오랫동안 알고 지냈다. 윌리엄 오브 말름스베리는 헨리가 그녀에게 "오랫동안 매료되었다"고 말했고, 오데릭 비탈리스는 헨리가 그녀의 성격과 능력에 "오랫동안 숭배했다"고 말했다. 헨리는 잉글랜드에서 태어났지만, 고대 웨섹스 왕가와 연관된 신부는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를 높이고 노르만족과 앵글로색슨족을 화해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에디스는 웨섹스 왕가의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증손녀였으며, 그들의 후계자인 두 세력이 통합되어 새로운 정권을 더욱 통합하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점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정치적으로 더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그녀의 세 오빠가 연이어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고 잉글랜드에 대해 이례적으로 우호적이었다. 알렉산더 1세는 시빌라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헨리 1세의 사생아 중 한 명이었고, 데이비드 1세는 즉위하기 전 한동안 헨리의 궁정에 머물렀다.

에디스가 인생의 많은 부분을 수녀원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녀가 수녀였는지, 따라서 결혼할 수 없는지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롬지 수도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의 고모 크리스티나는 그녀에게 베일을 쓰도록 강요했다.

웨섹스의 크리스티나, 에디스를 수녀의 베일를 쓰도록 강요한 고모이자 수도원장.


의지가 강했던 에디스는 수도원에 머물기보다는 결혼할 수 있는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고모는 그녀가 "베일을 쓴 수녀이며, 그녀를 수녀원에서 떼어내는 것은 신성 모독 행위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앤셀름이 오랜 망명 생활을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그에게 찾아가 자신이 수녀가 된 적이 없다고 설득했다. 사실, 그녀는 베일을 쓰도록 강요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아버지는 베일 쓴 그녀를 보자마자 "불쾌한 머리 장식을 찢어 [...] 산산조각"냈다.

앤셀름은 스스로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결정할 의사가 없다고 밝히면서, 제안된 결혼의 교회법적 적법성을 결정하기 위해 주교 회의를 소집하고, 이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윌턴에서 두 차례 조사를 명령했다. 에디스는 자신이 결코 서약을 한 적이 없다고 증언하면서, 부모가 교육 목적으로 잉글랜드로 보냈으며 고모가 그녀를 "노르만족의 욕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베일을 씌웠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베일을 벗어 짓밟았고, 이에 그녀의 고모는 그녀를 때리고 꾸짖었다. 회의는 에디스가 수녀가 아니었고, 결코 수녀였던 적이 없으며, 부모는 그녀가 수녀가 되기를 의도하지 않았고, 결혼을 허락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3. 2. 잉글랜드 왕비로서의 역할

에디스는 1100년 11월 11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앤설름에 의해 헨리와 결혼했다. 결혼식 후 에디스는 대관식을 치르고 '마틸다'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1] 이는 신성한 노르만 이름이었다. 이름을 바꾼 정확한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역사가들은 그녀가 노르만 신하와 남편을 기쁘게 하려는 시도였을 것으로 추측한다.[1] 그러나 궁정 사람들은 그녀와 남편에게 곧 '고드릭과 고다이바'라는 별명을 붙였는데,[3] 이는 잉글랜드 노르만 정복 이전의 전형적인 잉글랜드 이름으로, 특히 윌리엄 2세의 화려함과 비교했을 때 그들의 좀 더 소박한 스타일을 비웃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틸다의 웨스트민스터 궁정은 시인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특히 음악 분야의 예술 후원자로 알려졌다.[4]

여왕 마틸다의 옥새


남편이 노르망디프랑스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하느라 자주 자리를 비우는 동안 잉글랜드의 섭정으로 활동한 마틸다 여왕은 헨리 1세의 궁정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그녀는 잉글랜드 전역을 여행했으며 1106년에서 1107년 사이에는 노르망디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다.[5]

런던 협약 (1103–07) 기간 동안 마틸다는 헨리 1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름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다.[6] 그녀는 안셀름이 부재 중일 때 여러 통의 편지를 썼는데, 처음에는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돌아올 것을 요청했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중재를 요청했다.[7] 여왕의 도움으로 이 문제는 1105년에 타협적인 해결책을 통해 해결되었다. 즉, 국왕은 자신이 직접 주교를 선택하고 임명할 권리를 포기했지만, 교회는 국왕이 자신의 영토 내에서 교회가 소유한 세속적 토지에 대해 주교로부터 충성을 받을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3. 3. 건축 사업과 자선 활동

마틸다는 건축에 큰 관심을 보여, 월섬 수도원과 홀리 트리니티 수도원, 올드게이트 등 노르만 양식 건물 건설을 지원했다.[1] 리 강을 건너 바킹 수도원으로 가는 수행원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스트랫퍼드-르-보우에 영국 최초의 아치교인 보우 다리(런던)를 건설하고 습지에 제방을 쌓았다.[2]

마틸다는 어머니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으로도 유명했는데, 퀸히스에 공중 화장실과 파이프로 물을 공급하는 목욕탕을 건설했다.[3] 또한 나병에 특별한 관심을 가져, 세인트 자일스 인 더 필즈 교구가 된 기관을 포함하여 최소 두 곳의 나병 환자 병원을 설립했다.[4]

4. 대외 관계

독일의 하인리히 5세는 1108년 말 또는 1109년 초에 헨리 1세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의 딸 마틸다와의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2] 잉글랜드 왕은 이 결혼을 통해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하고 프랑스와의 갈등에서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3] 하인리히 5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대관식을 위한 로마 원정 자금으로 10000마르크의 지참금을 받기로 했다.[4] 1109년 6월 웨스트민스터에서 거래가 타결되었고, 마틸다는 1110년 2월 결혼 준비를 위해 독일로 떠났다.[5]

4. 1.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1108년 말 또는 1109년 초, 독일의 하인리히 5세는 사절을 헨리 1세에게 보내 자신의 딸 마틸다와의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2] 이 결혼은 잉글랜드 왕에게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는 딸을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군주 중 한 명과 결혼시킴으로써, 새로운 왕가의 막내아들이라는 자신의 다소 모호한 지위를 재확인하고, 프랑스와의 갈등에서 동맹을 얻을 수 있었다.[3] 그 대가로 하인리히 5세는 로마 원정을 위한 자금, 즉 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대관식을 치르기 위한 10000마르크 (화폐)의 지참금을 받기로 했다.[4] 이 거래의 최종 세부 사항은 1109년 6월 웨스트민스터에서 타결되었고, 마틸다는 결혼 준비를 위해 1110년 2월 잉글랜드를 떠나 독일로 향했다.[5]

5. 신앙심과 유산

마틸다는 "지극히 거룩한 여인"으로 묘사되었으며, 신하들에게는 ''선한 여왕 마틸다''로 기억되었다.[1][2] 교회에 대한 관대함으로 유명했고,[3] 수도원과 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지원했다.[4]

1118년 5월 1일,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하여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1][2][3] 1120년 화이트 쉽의 비극으로 아들 윌리엄 애설린이 사망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고, 그 결과 긴 내전이 일어났다.[4]

마틸다 여왕의 명성은 손자 헨리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13세기 말과 14세기 사이에는 점점 덜 기억되었다.[5]

5. 1. 신앙심

마틸다 여왕은 "지극히 거룩한 여인으로, 경건함에 있어서는 어머니와 비견될 만하며, 자신의 인품에 있어서는 모든 악한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다"고 묘사되었다.[1] 그녀는 신하들에게 ''선한 여왕 마틸다''로 기억되었으며[2] 한동안 성인으로 추앙받으려 했지만, 시성되지는 못했다.

마틸다는 교회에 대한 관대함으로 유명했으며[3] 수도원과 나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하고 지원했다.[4] 맬즈버리는 그녀가 사순절 기간에 맨발로 교회에 참석하고, 병든 자들의 발을 씻고 손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했다고 묘사했다.[5] 마틸다 여왕은 1106년에서 1118년 사이에 쓰여진 수도사 벤데이트가 저술한 ''성 브렌단의 항해'' 버전에 대한 후원자였다.[6] 그녀는 또한 더럼의 수도사 터고트에게 자신의 어머니인 성 마가렛의 전기를 쓰도록 의뢰했다.[7]

5. 2. 죽음과 유산

1118년 5월 1일, 마틸다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했다.[1]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녀의 앵글로색슨 출신 시녀 3명이 여왕의 죽음에 매우 비통해하여 즉시 수녀가 되었다고 한다.[1] 마틸다는 홀리 트리니티, 올드게이트에 묻히고 싶어했지만, 헨리 1세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참회왕 에드워드 근처에 그녀를 안장했다.[2][3] 그녀의 무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여기에 당시 젊은이와 노인을 모두 능가했던, 유명한 여왕 마틸다 2세가 잠들다. 그녀는 모든 이에게 도덕의 척도이자 삶의 장식이었다."[2]

마틸다의 아들 윌리엄 애설린이 1120년 화이트 쉽의 비극으로 사망하고, 그녀의 과부가 두 번째 결혼에서 적자를 낳는 데 실패하면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고, 그 결과 긴 내전이 일어났다.[4] 스테판은 재위 기간 동안 여왕 마틸다가 실제로 수녀였고, 따라서 그녀의 딸인 마틸다 여황제는 잉글랜드 왕위의 정당한 계승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5]

마틸다 여왕의 명성은 손자 헨리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상당히 개선되었지만, 13세기 말과 14세기 사이에는 점점 덜 기억되었다.[5]

6. 자녀


  • 마틸다 (1102년 2월 7일 – 1167년 9월 10일)[6]
  • 윌리엄 아델린 (1103년 8월 5일 – 1120년 11월 25일)[7]


마틸다와 헨리 1세는 1101년 7월에 아이를 사산했을 수도 있다.

참조

[1] 서적 The Government of England Under Henry I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9
[2] 서적 1991
[3] 서적 1982, 1991
[4] 서적 1991
[5] 서적 1991
[6] 웹사이트 Matilda daughter of Henry I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24-03-26
[7] 웹사이트 William the Aetheling https://www.britanni[...] Encyclopædia Britannica, Inc. 2024-04-16
[8]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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